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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기세를 의미한다. 속 뜻을 살펴보면 분위기 한 번 타면 한방에 밀고 나간다는 의미

- 파죽지세는 대나무를 자르듯이, 그 어떤 방해 없이 순조롭게 일이나 일을 진행하는 강력한 기세나 힘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용어

 

유래

  • 파죽지세"죽을 파다(破)", "대나무 죽(竹)", "갈 지(之)", **"세(勢)"**의 네 글자로 구성됩니다.
  • 이 성어의 유래는 중국 전쟁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삼국지에서 조조가 대나무를 자르는 데 비유하여 사용되었으며, 대나무를 자를 때처럼 멈추지 않고 기세 좋게 물리적 혹은 정신적으로 쳐 나가는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 조조적군을 대나무처럼 쳐 나가며 전투에서 승리하는 상황을 비유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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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근묵자흑(近墨者黑)은 "먹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라는 뜻으로, 

주변 환경이나 사람의 영향을 받아 나쁜 쪽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 즉, 나쁜 사람이나 환경에 가까이 있으면 나쁜 영향을 받아 그 사람과 같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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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아관 파천: 고종과 세자가 을미사변 후인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

이 사건으로 조선의 정세가 바뀌었다. 수틀리면 경복궁에 칼 들고 달려가던 일본이었지만, 러시아의 허가 없이는 건드릴 수 없는 러시아 외교 공관에 머무는 고종을 일본은 더 이상 압박할 수 없어 을미사변으로 구성된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었고, 그 대신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됐다.

 

2.용어

'아(俄)' 는 당시 러시아의 중국식 표현인 '아라사(俄羅斯)'의 머리글자

'관(館)'은 '공사관(公使)'의 을 뜻한다.

'파천(播遷)' 단어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 즉, 아관 파천(俄館播遷)이란 임금이 아라사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뜻이다. 일본식 음차인 '노서아(西亞)'의 앞머리를 따서 노관 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참조:나무위키

3.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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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은 '밝은 마음에 대한 보고서' 또는 '밝은 마음을 기록한 보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명심(明心)'은 밝은 마음, 옳은 생각을 의미하고, '보감(寶鑑)'은 보물 같은 가치가 있는 책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명심보감'은 올바른 사고와 행동에 관한 가르침을 담은 책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조선() 시대()에,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한문() 교양서(). 고려() 충렬왕() 때에 명신() 추적()이 중국() 고전()에서 보배로운 말이나 글 163항목()을 가려서, 계선()ㆍ천명()ㆍ권학()ㆍ치가() 따위의 24개 부문()으로 나누어 배열()ㆍ편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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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게 된 경우나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서로 적대시하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탔으나 풍랑을 만나서

서로 단합()하여야 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출전()은 ≪손자()≫의 <구지편()>이다.

- 네이버 사전-

 

오월동주()’는 여기에서 비롯했다.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나 처지에 놓여 같은 목적을 이루려고 협력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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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불쇼에서 한국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해 다시 인식하기 위해 글로 남김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저급 불량쌀로 지급하여 일어난 난이다.

<요약>

19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위기 또는 그 시대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려는 당시의 사 상은 크게 나누어 볼 때, 기본적으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개화사상(開化思想), 동학 사상(東學思想) 등 세 개의 사조(思潮)로 등장하였다. 이 세 사조는 각기 나름대로 그 시대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위정척사사 상은 보수(保守) 기득권층(旣得權層)을 중심으로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개화사상은 양반(兩班)과 중인(中人) 출신의 소수 지식인들, 소위 개화파(開化派)들이 서구 열 강의 힘의 원천을 근대적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 사회 경제 제도에 있다고 보고, 이를 도입함 으로써 체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는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동학사상 은 서구의 힘의 원천을 서학(西學)이라고 보고, 이에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서양의 침탈을 막 고 체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사상이다. 이 사상은 그 주체를 농민(農民)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사조를 바탕으로 그 시대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대표적 사건이 바로 임오군변(壬午軍變)과 갑신정변(甲申政 變)이다. 임오군변은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보수적인 양반세력이 약화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원군을 앞세운 재집권(再執權)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갑신정변은 개화사상 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엘리트 세력들이 서구적인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일으켰던 정치적 쿠 데타였다.

 

갑신정변()은 1884년(갑신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요약>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군이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여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정변에서 급진 개화파는 여러 온건 개화파들을 살해한다. 윤태준[4], 한규직[5], 이조연[6] 등 영선사 출신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개화에 적극적이었던 민영목[7], 민태호[8], 그리고 조영하[9] 등 여러 온건 개화파들이 살해당했다.

고종에게도 큰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으로,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모두 상당 수의 인재들이 사라져 향후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참조:나무위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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